[ Void ]
03 June 2023
에세이1ㅡ사건과 허무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건들을 겪는다. 그리고 겪어지는 그 사건들은 모두 인간이 자처해 만들어낸 것이다. 포괄적으로는 인간관계 부터 시작해서 학교라는 시스템, 시험, 축제, 생일파티 그 모든 것이 사건이다. 이 사건의 연속에서, 우리는 종종 허무를 느낀다. 초등학교 때 소풍 전날 들뜬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가, 소풍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느꼈던 황망한 감정이 기억나는가? 생일파티가 끝나고 케이크 기름으로 너덜너덜해진 종이접시들과 널브러진 풍선들을 터뜨리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들떴던 마음도 펑 하고 터져 없어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껴본적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것을 허무라고 부른다. 모나리자를 본 사람들은 수많은 인파에 가려 보기 힘든 모나리자에 허무감을 느끼곤 한다. 희대의 명작이라고 불리는 모나리자가 고작 손바닥 두장만한 그림이었다니! 하고 말이다. 이벤트로 들떴던 기분이 사라질 때. 아주 기대했던 일이 별거 아니었을 때.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뤘지만 여전히 갈증을 느낄 때 우리는 허무하다고 말한다. 사건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은 끊임없이 사건을 만들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허무한 감정을 느낀다.
라고 분석적인 글을 쓰다가. 나도 분명 어릴 적엔 허무감을 느꼈던 것 같은데 왜 지금은 그 감정이 사라졌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없다고 믿는 건가. 무시하는 건가. 어릴 땐 분명 느꼈던 것 같은데. 그렇기에 허무는 보이진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며,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도대체 허무란 무엇인가??????에 답을 얻기 위해 사전을 뒤적였다.
에세이2ㅡ허무의 정의
1.아무것도 없이 텅 빔.
2.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매우 허전하고 쓸쓸함.
3.철학 노자의 학설에서, 형상이 없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우주의 본체.
사전적 정의의 2
전쟁이 끊이지 않던 과거를 뒤로하고 인류는 만년의 역사 끝에 평화라는 꼭짓점 위에 서 있다. 언제 미끄러질지 모르지만. 알쓸신잡에서 김영하가 말하길, 인류의 역사에서 50년간의 평화를 유지한 건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먼 미래에 지금의 역사는 태평성대로 기록될 것이라고. 끝없던 동족 학살의 끝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인류는 어째서 수년 동안 지속해오던 동족학살을 멈추고 평화를 택한 걸까.
물론, 종종 몇몇 국가에서는 내전이 있어왔고, 그 뒤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발생하며 지구적 평화에 금이 갔지만. 과거 조상들은 언제 불어닥쳐올지 모르는 전쟁의 위기를 늘 염두에 두며 살아야 했다. 언제 찾아와 모든 것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을지 모르는 전쟁에 대한 불안감은 그들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했을까. 야속하게도 피해 가지 못한 전쟁에서 그 끝에 찾아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족을 잃고,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고, 또는 운 좋게 싸워 이겨 돌아온 전쟁에서 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지금 이 시대에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허무라는 감정이 그들을 찾아왔을 거라 감히 예상해 본다.
아직 동물적 본능이 진하게 남아있던듯 어마어마한 영역싸움의 시기를 지나, 이제 인류는 조금 더 고차원적인 생물이 되었다. 물리적 전쟁을 멈추고 두뇌로 하는 전쟁을 시작했다. 아-주 좋은 말로 바꿔 말해 보자면 태평성대.
그렇다면, 그 태평성대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허무로부터 안전한가? 대답은 아니오이다. 죽이고 죽임을 당하던 참혹한 전쟁의 시대를 지났지만 어쩌면 더 잔인한 시대를 맞이했다. 스스로를 죽이는 시대. 그렇다면 도대체 허무라는 감정은 어디에서 출발하며, 왜 찾아오는 것일까.
사전적 정의 3과 1
칼 세이건이 집필한 코스모스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돌이켜 보건대 인류는 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잠시 지구라 불리는 세계에 몸을 담고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원초적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감히 그 기나긴 여정의 첫 발을 내딛고자 하는 것이다.ㅡ 우리가 지구 생명의 본질을 알려고 노력하고 외계 생물 존재를 확인하려고 애쓰는 것은 실은 하나의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두 개의 방편이다. 그 질문은 바로 ‘우리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이다.ㅡ 기원, 지구의 기원, 우주의 기원, 외계 생명과 문명의 탐색, 인간과 우주와의 관계를 밝혀내는 일은 인간 존재의 근원과 관계된 인간 정체성의 근본 문제를 다루는 일이 아니고 또 무엇이란 말인가?>
칼 세이건은 인류가 우주를 탐험하는 이유가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라고 했다.
138억 년 전,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빅뱅이 일어나고 우주가 시작되었다. 혼돈의 시기와 분리의 시기를 거쳐 태양과 지구가 탄생하고 단세포의 원핵생물이 출현했다. 단세포가 다세포가 되고 단순생물이 고차원의 생물로 진화를 했다. 그 끝에 우리가 지금 여기 서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던 태초의 우주ㅡ허무ㅡ로부터 왔다. 우리가 우주에 느끼는 무한한 경외감과 알고자 하는 욕망은 모두 우리가 우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인류가 우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의 근원을 궁금해하기 때문이며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내재적 욕망인 것이다. 허무는 우리의 시작이며 끝으로 우리가 돌아갈 곳이다.
03 June 2023
에세이1ㅡ사건과 허무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건들을 겪는다. 그리고 겪어지는 그 사건들은 모두 인간이 자처해 만들어낸 것이다. 포괄적으로는 인간관계 부터 시작해서 학교라는 시스템, 시험, 축제, 생일파티 그 모든 것이 사건이다. 이 사건의 연속에서, 우리는 종종 허무를 느낀다. 초등학교 때 소풍 전날 들뜬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가, 소풍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느꼈던 황망한 감정이 기억나는가? 생일파티가 끝나고 케이크 기름으로 너덜너덜해진 종이접시들과 널브러진 풍선들을 터뜨리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들떴던 마음도 펑 하고 터져 없어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껴본적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것을 허무라고 부른다. 모나리자를 본 사람들은 수많은 인파에 가려 보기 힘든 모나리자에 허무감을 느끼곤 한다. 희대의 명작이라고 불리는 모나리자가 고작 손바닥 두장만한 그림이었다니! 하고 말이다. 이벤트로 들떴던 기분이 사라질 때. 아주 기대했던 일이 별거 아니었을 때.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뤘지만 여전히 갈증을 느낄 때 우리는 허무하다고 말한다. 사건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은 끊임없이 사건을 만들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허무한 감정을 느낀다.
라고 분석적인 글을 쓰다가. 나도 분명 어릴 적엔 허무감을 느꼈던 것 같은데 왜 지금은 그 감정이 사라졌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없다고 믿는 건가. 무시하는 건가. 어릴 땐 분명 느꼈던 것 같은데. 그렇기에 허무는 보이진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며,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도대체 허무란 무엇인가??????에 답을 얻기 위해 사전을 뒤적였다.
에세이2ㅡ허무의 정의
1.아무것도 없이 텅 빔.
2.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매우 허전하고 쓸쓸함.
3.철학 노자의 학설에서, 형상이 없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우주의 본체.
사전적 정의의 2
전쟁이 끊이지 않던 과거를 뒤로하고 인류는 만년의 역사 끝에 평화라는 꼭짓점 위에 서 있다. 언제 미끄러질지 모르지만. 알쓸신잡에서 김영하가 말하길, 인류의 역사에서 50년간의 평화를 유지한 건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먼 미래에 지금의 역사는 태평성대로 기록될 것이라고. 끝없던 동족 학살의 끝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인류는 어째서 수년 동안 지속해오던 동족학살을 멈추고 평화를 택한 걸까.
물론, 종종 몇몇 국가에서는 내전이 있어왔고, 그 뒤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발생하며 지구적 평화에 금이 갔지만. 과거 조상들은 언제 불어닥쳐올지 모르는 전쟁의 위기를 늘 염두에 두며 살아야 했다. 언제 찾아와 모든 것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을지 모르는 전쟁에 대한 불안감은 그들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했을까. 야속하게도 피해 가지 못한 전쟁에서 그 끝에 찾아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족을 잃고,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고, 또는 운 좋게 싸워 이겨 돌아온 전쟁에서 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지금 이 시대에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허무라는 감정이 그들을 찾아왔을 거라 감히 예상해 본다.
아직 동물적 본능이 진하게 남아있던듯 어마어마한 영역싸움의 시기를 지나, 이제 인류는 조금 더 고차원적인 생물이 되었다. 물리적 전쟁을 멈추고 두뇌로 하는 전쟁을 시작했다. 아-주 좋은 말로 바꿔 말해 보자면 태평성대.
그렇다면, 그 태평성대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허무로부터 안전한가? 대답은 아니오이다. 죽이고 죽임을 당하던 참혹한 전쟁의 시대를 지났지만 어쩌면 더 잔인한 시대를 맞이했다. 스스로를 죽이는 시대. 그렇다면 도대체 허무라는 감정은 어디에서 출발하며, 왜 찾아오는 것일까.
사전적 정의 3과 1
칼 세이건이 집필한 코스모스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돌이켜 보건대 인류는 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잠시 지구라 불리는 세계에 몸을 담고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원초적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감히 그 기나긴 여정의 첫 발을 내딛고자 하는 것이다.ㅡ 우리가 지구 생명의 본질을 알려고 노력하고 외계 생물 존재를 확인하려고 애쓰는 것은 실은 하나의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두 개의 방편이다. 그 질문은 바로 ‘우리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이다.ㅡ 기원, 지구의 기원, 우주의 기원, 외계 생명과 문명의 탐색, 인간과 우주와의 관계를 밝혀내는 일은 인간 존재의 근원과 관계된 인간 정체성의 근본 문제를 다루는 일이 아니고 또 무엇이란 말인가?>
칼 세이건은 인류가 우주를 탐험하는 이유가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라고 했다.
138억 년 전,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빅뱅이 일어나고 우주가 시작되었다. 혼돈의 시기와 분리의 시기를 거쳐 태양과 지구가 탄생하고 단세포의 원핵생물이 출현했다. 단세포가 다세포가 되고 단순생물이 고차원의 생물로 진화를 했다. 그 끝에 우리가 지금 여기 서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던 태초의 우주ㅡ허무ㅡ로부터 왔다. 우리가 우주에 느끼는 무한한 경외감과 알고자 하는 욕망은 모두 우리가 우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인류가 우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의 근원을 궁금해하기 때문이며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내재적 욕망인 것이다. 허무는 우리의 시작이며 끝으로 우리가 돌아갈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