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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무를 말하면서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
17 June 2023



허무를 말하면서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수빈 언니의 졸업 작업을 위한 설문조사 요청으로 설문지를 곰곰이 읽다 생각했다. 언니의 졸업 주제는 죽음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을 준비하는 법.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는 법.

언니의 작업에는 의식, 공간, 행동양식 등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오브젝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언니는 유골함을 디자인한다. 언니가 디자인한 유골함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동그랗고 하얀 병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기능이 있는 물건이다. 언니가 디자인한 시스템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개인은 하나의 물건(유골함)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죽을 때까지 삶 속에서 사용하며 살아있는 현재와 함에 담기게 될 사후를 생각한다. 오브제를 사용하는 순간순간의 행위는 무의식적이지만 동시에 의식적인 것이다.

언니가 나에게 보내준 설문지에는,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답하는 몇 가지 항목이 있었고 마지막 질문에는 내가 담기고 싶은 유골함을 그려달라고 되어있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질문들에 싱겁게 초반부의 질문들을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 중반부에서 예기치 못하게 맞닥뜨린 질문에 나는 멈춰야만 했다.

‘How would you like your frineds and family to remember you?’

글쎄.. 잘 모르겠다. 물론 긍정적이게 기억되고 싶지. 그렇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기억이 될까? 내가 죽으면 내 우주가 사라질 텐데, 그러면 내 우주에 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질 텐데. 기억이라는 기억도 개념도 머릿속과 종이 위에 적혀지던 이 활자들 조차도 모두 사라질 텐데. 아, 혹시나 있을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말해두자면 내 우주가 사라진다는 뜻은 나를 주축으로 돌아가던 내 안의 우주가 사라진 다는 뜻이지 타인의 우주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아 시방 뭔소리여 라고 할수도 있으니 조금 설명을 덧붙여 보겠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 모든 것을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내가 주인공인 책이라고 치자. 이 책이 내 우주인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당신이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펼쳐나가는 당신 책 속의 주인공이다. 그것은 당신의 우주이다. 그러니까- 내 우주에서는 내가 죽으면 이 모든 게 끝나버린다는 얘기. ㅡ주인공이 죽어도 계속되는 책은 없잖아. ㅡ내가 죽었다는 사실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도 이 지구도 안드로메다라는 은하도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는 창조주도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질 거라는 이야기. 하지만 당신의 우주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 뭐.. 만에하나 천에하나 내가 죽었다는 문장이 몇 줄 정도 나올 수는 있겠지. 그렇지만, 나라는 책은 이미 불타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내 우주에서는 결국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이다.

슈뢰딩거의 불쌍하고 귀여운 고양이가 말해주듯 우리는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결과로 무언가를 직접 마주하게 된다. 선택의 결과로 마주한 그 장면만이 나에게 실재가 된다. 그렇다면, 내가 마주하지 않은 순간은 실재하지 않는가? 그것도 실재한다. 다만, 그것을 마주한 또 다른 평행우주의 나에게 실재할 뿐이다. 그 또 다른 평행우주의 나는 지금 글을 쓰는 ‘나’는 아니어서, 내 책의 주인이 될 수 없기에 그건 내 우주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이 우주의 내가 죽으면 더 이상 그 무엇도 마주할 수 없다. 더 이상 ‘나’에게 실재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곧 ‘무’로 돌아감이 되겠다.(도깨비..?)

어쨌든, 긴 이야기의 결론을 말하자면. 죽으면 끝이다. 내 세계에 살던 당신들도 다 없어진다. 그러니까 기억되고 나발이고 할 게 없단 말이다. 근데 내가 지금 유골함을 디자인해서.. 뭘.. 뭘 해? 이건 내 생각과 너-무 반대되는 작업이었다. 고민은 되지 않았다. 언니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언니는 이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를 흔쾌히 수용해 주었고, 언니에게 설명하던 과정에서 더 큰 깨달음이 있었다.

(서론 생략) “내가 그림자를 그리는 이유는 순간에서 존재를 찾기 위한 건데, 깊게 들어가면 죽음과도 연관이 돼.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민은 삶과 죽음을 관통하고, 그 끝에 죽음이 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열망이 생긴다고 생각해. 그렇기에 동시에 허무함도 느끼는 거고-.

(중략)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죽고 나서 무언가를 남기고 싶지 않아. 살면서 붓으로 나를 일깨우다가, 죽으면 같이 나랑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래서, 사실 죽는 건 무섭지 않아. 죽는 과정이 무섭지. 아프지 않게 죽고 싶어서..?

그리고 조금 역설적이지만, 누가 내 세상에서 죽는 게 무섭지. 내가 죽는다는 생각은 별로 감흥이 없는데. 친구, 가족, 애인(있었을 땐😊)을 생각하면. 아. 나는 그들의 죽음을 생각할 때 더 삶의 유한성을 깨닫는 거 같아. 더 잘해야지. 더 소중하게 여겨야지. 이런 생각들을 엄청 해.(물론 잘 지켜지진 않지만😊) 언니랑 얘기하면서 더 명확해졌어. 나는 나의 죽음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 애정 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생각할 때 삶의 유한함과 소중함을 깨달아.

그런 측면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면, 어쩌면 타인도 나처럼 친구인, 애인인, 가족인 내가 죽는 게 무서울 수도 있잖아. 그래서 죽으면 아예 내가 사라지는 게 낫다고 여기는 걸지도 모르겠네. 내가 죽어서 내 우주가 전원 오프 되면, 내가 있던 우주는 모두 사라지고 처음부터 내가 없었던 우주만 남는 거야. 조금 웃길 수도 있지만, 평행우주나 뭐 이것저것 보면서 은연중에 가능하겠다 싶기도 했고. 웃기지만 쫌 진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