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표지판을 못 믿을 수도 있고, 표지판도 사람을 못 믿을 수 있지만,
콘노 유키
1. 전시의 표지판?
콜렉티브 도(collective doh)의 세 번째 전시 《당신을 못 믿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PS CENTER)에 대한 내용을 쓰기에 앞서, 전시 홍보 포스터¹에 주목하고 싶다—표지판에 주목하여 만든 작업을 소개하는 전시의 ‘표지판’ 역할을 하는 시각적 이미지를 먼저 보자. “당신을 못 믿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라는 말은 콜렉티브 도가 리서치와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 서울의 표지판을 본 인상을 반영한 문구이다. 주변을 걸어 다니면 자주 보이는 표지판은 지시와 안내 역할을 하지만, 종종 밈으로 소비되듯이 우스꽝스럽다. 그래픽 디자이너가 만든 홍보 포스터를 다시 보면, 전시 제목에서 따온 ‘못’이라는 글씨가 반복되어 배치되어 있다. 불가능성을 누누이 강조하는 안내판이나 표지판의 성격을 강조했다고 무난하게 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시각적인 특징에 주목하고 싶다. ‘못’이라는 글자는 표지판과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인지할 수 있다. 땅에 이미지의 형식(ㅁ)으로써 붙어 있는(ㅗ) 표지판(모)을 두 발로 서서 보는 사람(ㅅ)이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못’은 표지판의 방어 혹은 금지를 상징하는 동시에 우리가—그리고 콜렉티브 도의 구성원이 일상을 살면서 대면했던 그 순간을 상징하는 시각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용원, 박찬별, 서민경, 은희경, 지승환으로 구성된 콜렉티브 도가 표지판을 바라보는 시선은 《당신을 못 믿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라는 문장에서 ‘못’이라는 글자이자 이미지의 조형적 요소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보는 대상과 보는 이가 등신대로 상응하는 경험으로 발전된다.
2. 믿을 수 있지만, 맹신할 수는 없는
콜렉티브 도는 대형 스크린이나 디지털 사이니지(signage)—예컨대, 서울 스퀘어나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의 미디어 파사드(media facade)—대신, 대중교통이나 골목길에 볼 수 있는 간소하고 통일되지 않은 안내문 형식에 관심을 보낸다. 콜렉티브 도의 접근 방식은 일반적인 ‘표지판’의 범위를 확장함과 동시에 국한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필《당신을 못 믿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에 소란스럽게 간판들이 모인 오피스텔이나 미디어 파사드와 같은 기술적으로 발전된 도시 경관은 반영되지 않았을까. 추측컨대, 이들은 표지판이라는 매체에 압도되는 대신 그것과 등신대적인 소통을 시도했고, 관람객에게도 그러한 소통을 바란 것이다. 대형 스크린을 보는 경험은 우리에게 압도적이며, 초월적으로 다가온다. 오늘날의 미디어 파사드는 간판이나 안내판이라는 사물의 용도에 머물지 않고 벽인 동시에 환경이 되었다. 1993년의 한 인터뷰에서 폴 비릴리오(Paul Virilio)가 석재로 만든 벽이 스크린으로 대체되고 실제의 경계를 만든다고 말한 바와 같이², 미디어 월은 현대 생활에 침투된 ‘공간’이다. 이와 달리, 콜렉티브 도는 동파 주의의 반복된 문구, 주차 금지의 창의적이고 독특한 만듦새에 시각적인 흥미를 찾아, 도시 안에서 느낀 순간적이고 유연한 움직임을 매체와 그 물성을 통해서 기록한다. 대형 스크린이나 사이니지라는 전세계적인 현상—막대한 시각 정보에 무릎을 꿇고 묵언으로 압도되는—과 달리, 제목처럼 “당신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라는 화자와 청자 간의 ‘소통’을 시도한 전시라 할 수 있다. 추잡하고 때때로 과한, 그럼에도 지나가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 걸듯이’ 다가가는 문구와 서 있는 간판(시각적인 ‘모’)을 보는 사람(‘ㅅ’)으로 대면할 때, 이미지에 압도되기만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보내는 반응이 보인다. 궁극적으로 “당신을 못 믿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라는 한 마디는 표지판이 하는 말에 그치지 않고, 이미지를 대면한 우리가 반응해서 하는 말이 되어 메아리친다—우리는 당신(표지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맹신하지도 않는다. ㅁ이 벽과 환경이 되어버리는 시대에 살지만, 콜렉티브 도의 ㅅ들은 ㅁ을 등신대로 상대하였다.
3. 공을 너무 많이 던지는 투수와 태연히 걷는 사람들
콜렉티브 도의 작품은 아카세가와 겐페이(赤瀬川源平)의 『초예술 토머슨』(1987)에 소개되는 사물들을 연상할 수 있다. 하지만, 아카세가와가 길거리에 용도를 잃은 상태로 남아 있는 물건에 관심을 보냈다면, 콜렉티브 도의 작가들은 현대의 순간적인 기표나 기호인 표지판에 관심을 보냈다. 초예술 토머슨이라고 불리게 된 어느 시기의 유물과 달리, 《당신을 못 믿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에서 작가들이 주목하여 작업으로 연결한 소재들은 쓸모가 눈에 띄게 강조된, 의미와 메시지가 담긴 물건들이다. 아카세가와가 토머슨이라는 야구선수에 비유한 표현³을 빌리자면, 콜렉티브 도가 한국에서 (재)발견한 미감은 필요 이상으로 공을 던지는—심지어 ‘직격타’를—투수와도 같다. 이런 직격타를 우리는 일상에서 수없이 보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박찬별의 작품 <훈장 시리즈>(2025)나 <밤새 뭐 했길래 아직도 못 일어나?>(2025)에는 돌봄과 관심이 지나치게 개인에게 간섭하는 문장이 있다. 도시의 표지판은 엄마의 잔소리와 닮아 있다고 말하는⁴ 박찬별에게 표지판은 일상에서 무의식적인 통제로 기능하며, 작품은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을 훈장이나 장식 요소로 ‘형식적으로’ 기념 또는 기록하여 보여준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가 교차하는⁵ ‘한국적인’ 측면은 노용원의 연작 <도깨비 아파트>(2025)에서 찾을 수 있다. 주차금지 표지판에 착안한 이 작업에서 낡은 생활용품으로 급조한⁶ 미감은 (비록 그가 다른 나라, 특히 동남아시아권의 풍경도 같이 참고했을지라도⁷) 개인적인 만듦새와 대중에게 메시지를 알리는 역할이 결합한 형식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파트’라는 공동체가 ‘도깨비’와 같이 찰나에만 나타나는 환영적인—그러나 분명히 실재하는—결속임을 보여준다.
4. 요령은 어디에 있을까?
표지판이 일종의 경고, 안내, 지시 역할을 하겠지만, 사실상 여기에는 절대적인 금지보다 억제, 그러니까 완벽히 통제하기 어려운 여지가 항상 있다. “당신을 못 믿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라고 마치 말을 걸듯이 서 있거나 벽에 붙어 있지만, 우리는 표지판을 아예 못 본 척하고 넘어갈 수 있다. 표지판의 역할은 통제적인 동시에 관용적이다—비록 시민들은 신경을 하나도 안 쓸지라도 말이다. 관용적 태도는 ‘요령’이라는 단어에도 함축된다. 서민경의 <통과 요령>(2025) 연작이 보여주듯이, ‘뛰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있어도 사람들은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지하철 역사 내에서 충돌하지 않고 잘 피해 가는 능력을 발휘한다. 그들은 바빠서 그런 거겠지만, 서민경의 시선에는 과도한 표시판을 잘 피해 가는 몸짓으로 보였다—도시 생활 속 시지각적 자극에 유연히 대처하는 요령으로써의 몸짓. 지시와 명령의 시지각적 언어가 사람들을 통제하고 관습에 적응하도록 훈련한다면, 이에 거역하는 몸짓을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스스로 훈련한 것이다. 서민경의 시선은 카메라를 가진 자의 추적 행위이지만, 한편으로는 피사체가 시공간, 즉 순간과 카메라 프레임에 고정되지 않고 지나가길 허용하는, 말하자면 요령에서 벗어나기 위한 요령으로 제시된다. 작가는 지침을 뜻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노하우를 의미하기도 하는 ‘요령’이라는 단어의 이중성을 흔들리는 잔상에 기록하여 보여준다.
5. 양끝을 잡고 줄다리기 하듯이
콜렉티브 도의 관심사가 지하철을 비롯한 도시 공간에 향하긴 했지만, 우리는 미술 전시장에서도 종종 표지판을 본다. 많은 전시가 “눈으로만 보세요” 또는 “선을 넘지 마세요”라는 문구를 통해서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하게 하거나, 반대로 “만져 보세요” “한 사람씩 들어가서 보세요”처럼 적극적인 감상을 권유한다. 그냥 볼 수밖에 없는, 또는 그냥 보고 싶어도 쉽지 않은 곳이 전시장—특히 미술관이다. 서민경이 전시장 바깥 세계에서 관찰한, 사람들의 유연한 동시에 태연한 모습은 은희경의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은희경의 작품은 도시 공간의 질서를 공원이나 작은 놀이터의 놀이기구(그네, 미끄럼틀, 등)를 모티브로 삼고, 재료의 특성을 활용하여 시각적으로도 굴절시켜 보여준다. 그는 적극적으로 관람객의 개입을 허락한다. 전시장 안에서 요구되는 관람 예절을 잠시 벗어나, 사람들은 <휘어지는 선_벽>을 만지거나 <휘어지는 선_펜스>를 움직일 수 있고 <구르는 선>을 발로 찰 수 있다. 이런 경험은 전시를 다시 현실로 연결하여 보내 준다—이 좁은 도시 공간에서 속도감 있게 반응하는 것보다도, 사물과 환경을 내가 규칙으로 통제하는 대신 시간을 들여 상황에 맞게 관리(management)할 수 있도록 내가 있는 쪽으로 가져와서 ‘살펴’보기. 관념적으로 구획된 선은 분별을 뜻하는 대신 양끝을 서로 잡고 줄다리기 하듯이 힘의 균형에 움직임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도시 공간은 사람을 통해서 재편되는, 다르게 보여지는 곳이 된다.
6. 기념비 또는 비석의 파급력
표지판은 일상에서 금방 없어지거나 대체되기 쉬우며, 주목받지 못하는 대상이다. 콜렉티브 도가 다루는 재료나 소재도 그런 측면이 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다섯 명의 작품에 기념비 또는 비석의 형식을 찾을 수 있다. 작품을 하나의 표지판 삼자면, 콜렉티브 도의 작품은 현실을 잠깐 멈춰 세워, 그 현상을 주목하여 확대해서 보여준다. 지승환이 기대하는 것처럼 “다름을 이해하기 위한 첫 걸음은 타인이 아닌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는 일이다. 관용은 진정에서 나오고, 관계 속에서 번져나가기 때문에, 이 작업이 그 전염에 보탬이 되길 바란다.”⁸ 동명의 작업 <현재완료>는 스티커로 붙어 있던 동파주의 대응의 흔적을 ‘현재완료’라 호명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종결되지 않은 전달력을, 작품이 놓인 그곳으로부터 메시지가 확산하고 전파되는 파급력을 감지했다. 전시장을 나가는 길에 본 <동파주의>(2025)는 그렇게 서 있었다. 원본과 대조되는 희미한 글씨는 소란스럽고 상투적인 훈계, 임기응변의 반복, 단조로운 그래픽 디자인을 추모함과 동시에 표지판의 원래 역할인 전달력을 되살린다. 사람들은 표지판을 못 믿을 수도 있고, 표지판도 사람을 못 믿을 수 있다. 그런데도 서로 가까이 다가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그것을 ‘관용’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당신을 못 믿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는 양자의 대면을 관객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도모하였다. 이미지(ㅁ)와 사람(ㅅ)의 어느 한쪽이 커지거나 힘을 가지지 않는, 등신대적 시선을 혼잡한 도시에 가지고 왔다. 그리하여 ‘도시’는 ‘못’, 즉 보는 이와 보는 대상의 등신대적 관계를 통해서 풀이된다.⁹
¹ 그래픽디자인은 유지연이 맡았다.
² アン・フリードバーグ, 井原慶一郎, 宗洋(訳), 『ヴァーチャル・ウィンドウ――アルベルティからマイクロソフトまで(Anne Friedberg, The Virtual Window: From Alberti to Microsoft』, 産業図書, 2012, p. 250
³ 두 번째 시즌부터 부진을 겪었음에도 토머슨은 구단의 4번 타자로 계속 섰다. 히트를 치지 못한 채 계속 그 자리에서 방망이를 휘두르기만 했던 모습을 은유한 표현이다.
⁴ 특히 ‘엄마에게 받는’ 돌봄과 관심이 이에 해당한다. 박찬별은 “도시의 표지판은 엄마의 잔소리와 닮아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중 박찬별의 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를 참고.
⁵ 전시 설명 참고. 예컨대, 개인의 성공을 기원하는 동시에 효도해야 한다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다. 콜렉티브 도는 그들이 거주하는/거주한 적이 있는 네덜란드 내륙과의 비교를 통해서 대한민국 서울이라는 지역을 본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한때 살던 곳을 떠난 사람들이 향수에 빠지는 대신 다른 지역을 거쳐 와 다시 바라보고 재발견하는 시선이 있다.
⁶ 실제로 노용원은 수집한 의자나 빗자루를 출품작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⁷ 노용원은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의 거리에서 종종 볼 수 있는 ‘Spirit house(또는 Spirit shrine)’의 형태 또한 참고하였다.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중 노용원의 글 《양식 도깨비》를 참고.
⁸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중 지승환의 글《현재 완료》 를 참고.
⁹ ‘도시’와 ‘못’이라는 글씨의 조형적 공통점을 살펴보고, 선이 왔다 갔다 하는 움직임을 떠올려보길 바란다.